Jason JunJason Jun

아메리칸 프로메테우스

Kai Bird, Martin J. Sherwin

Highlights

반항적인 그리스의 신 프로메테우스가 제우스로부터 불을 훔쳐 인류에게 주었듯이, 오펜하이머는 우리에게 핵이라는 불을 선사해 주었다. 하지만 그가 그것을 통제하려고 했을 때, 그가 그것의 끔찍한 위험성에 대해 경고하려고 했을 때, 권력자들은 제우스처럼 분노에 차서 그에게 벌을 내렸다.

엘라는 철저한 규칙에 따라 집안을 운영했다. “탁월함과 목적(excellence and purpose)”이라는 가훈은 오펜하이머의 귓가에서 떠날 날이 없었다

오펜하이머 가족의 한 친구가 나중에 말했듯이, “로버트는 부모님의 사랑을 아주 듬뿍 받았습니다. 그는 가지고 싶은 것은 무엇이든 가질 수 있었죠. 사치스럽게 자랐다고 할 수 있을 정도로요.” 하지만 오펜하이머의 어릴 적 친구들은 아무도 그가 버릇없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로버트에게는 자신이 원하는 정도의 속도로 성장할 수 있는 모든 기회가 주어졌어요.” 어느 날 율리우스는 오펜하이머에게 전문가 수준의 현미경을 주었고 그것은 곧 오펜하이머가 가장 아끼는 장난감이 되었다. 오펜하이머는 나중에 “나는 나의 아버지가 이 세상에서 가장 관대하고 인간적인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그는 다른 사람들이 무엇을 원하는지 알아내고는 그것을 해 주었다.”라고 말했다.

“우리가 조금이라도 관심을 보이면 부모님들은 금세 그것을 구해 주셨어요.”라고 프랭크는 기억했다. 프랭크가 고등학생일 때 잠시 제프리 초서(Geoffrey Chaucer, 1342?~1440년)에 관심을 보이자 율리우스는 바로 뛰쳐나가서 그 시인의 1721년도 초판 시집을 사다 주었다. 프랭크가 플루트를 연주하고 싶다고 하자 그의 부모들은 미국의 위대한 플루트 주자 중 하나였던 조지 바레레(George Barère)를 가정 교사로 고용했다.

오펜하이머가 나이 먹어서 보이게 되는 정치적 감성은 그가 애들러의 학교에서 받은 진보적 교육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한창 성장기였던 시기에 그는 자신이 더 나은 세상을 만들기 위한 촉매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있었다.

오펜하이머는 집으로 보내는 편지에 다른 아이들이 인생의 진실 몇 가지를 가르쳐 주고 있다고, 그래서 캠프에 오기를 잘한 것 같다고 쓰는 실수를 저질렀다. 이 편지를 받은 오펜하이머 부부는 곧 캠프장으로 달려왔고, 면담의 결과로 캠프 책임자는 아이들이 저속하고 성적인 이야기를 주고받는 것을 전면적으로 금지하기에 이르렀다. 당연하게도 오펜하이머는 아이들 사이에서 고자질쟁이로 지목을 받았고, 어느 날 밤 아이들은 그를 캠프 얼음 창고로 끌고 가서 옷을 벗기고 두들겨 팼다. 마지막으로 아이들은 오펜하이머의 엉덩이와 성기를 초록색 페인트로 칠하고 밤새 얼음 창고에 벌거벗은 채로 가뒀다. 그의 유일한 캠프 친구는 나중에 이 사건을 “고문”이라고 표현했다. 오펜하이머는 이 엄청난 치욕을 금욕적인 침묵으로 견뎠다. 그는 캠프를 떠나지도 불평하지도 않았다. 그의 친구는 “로버트가 어떻게 나머지 몇 주간을 버텼는지 모르겠어요.”라고 말했다. “보통 사람이라면 캠프를 그만 두고 집으로 돌아갔을 겁니다. 아니, 돌아갈 수밖에 없었을 테지요. 하지만 오펜하이머는 견뎌 냈어요. 그에게는 지옥 같았을 겁니다.” 오펜하이머와 친한 사람이라면 그가 겉보기에는 너무 단단해서 부서지기 쉬울 것 같지만 속으로는 고집스러운 자존심과 결단력으로 똘똘 뭉친 금욕적 성품을 가졌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이와 같은 성격은 그의 일생 동안 때때로 드러났다.

1922년 9월에 오펜하이머는 하버드 대학교에 입학했다. 하버드에서는 그에게 장학금을 수여했지만, 그는 “그 돈 없이도 살아갈 수 있다.”라며 거절했다.

내성적이고 지적인 오펜하이머는 체호프(Chekhov)와 캐서린 맨스필드(Katherine Mansfield) 같은 어두운 정신세계를 가진 작가들의 작품을 즐겨 읽었다. 그는 셰익스피어의 희곡에 등장하는 인물들 중에서 햄릿을 가장 좋아했다. 호건은 몇 년 후 “오펜하이머는 어린 시절 대단히 심각한 우울증에 시달렸습니다. 한번 우울증에 빠지면 며칠 동안은 감정적으로 소통이 불가능할 정도였죠. 내가 그와 함께 지낼 때 그런 적이 한두 번 있었습니다. 나는 도무지 이유를 알 수 없어 괴로웠습니다.”라고 회고했다.

스미스 선생 역시 이와 같은 성향을 알아채고는 오펜하이머에게 “자네는 내가 아는 물리학자들 중 유일하게 음악을 좋아하지 않는 사람이네.”라고 말한 적이 있다.

오펜하이머가 물리학을 배우는 방식은 무계획적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였다. 그는 기초적인 내용은 모두 건너뛰고 가장 흥미롭고 추상적인 문제에 집중했다. 나중에 그는 자신의 듬성듬성한 물리학 지식 때문에 불안감을 느끼기도 했다고 고백했다.

1925년 늦가을에 오펜하이머는 자신의 정신적인 고통을 더 이상 견디지 못한 나머지 너무나 멍청한 행동을 저지르고 말았다. 블래킷으로부터 인정을 받지 못한 불만이 쌓이자, 그것은 곧 강한 질투심으로 이어졌다. 오펜하이머는 실험실에서 구한 화학 약품을 이용해 만든 “독”을 사과에 발라 블래킷의 책상에 올려 두었다. 와이먼은 나중에 “그것이 상상의 사과였든 진짜 사과였든, 그의 행동은 질투심의 발로였다.”라고 말했다. 다행히 블래킷은 사과를 먹지 않았다. 하지만 대학 당국이 이 사건에 대해 알게 되었다.

...오펜하이머는 의식적으로 자신의 감정적 허약함에 맞서려 노력했고, 이를 통해 어느 정도는 스스로의 정신 분석을 할 수 있는 경지에 이르렀다. 그는 퍼거슨에게 보낸 편지에서 자신의 정신 상태가 무언가 “탁월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끔찍한 사실”과 관련이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고 말했다. “구리선을 땜질할 능력도 없다는 사실이 아마도 나를 미치게 만들고 있지 않나 싶어.” 이어서 그는 “나는 지금 상태가 좋지 않아. 감정이 폭발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너를 만나러 가기가 두려워.”라고 고백했다.

“문제는 정신과 의사가 분석을 받는 사람보다 더 유능해야 하는데, 오펜하이머의 경우에는 그런 사람을 구할 수 없었다는 것이다.”

책은 오펜하이머의 고뇌하는 영혼에 답을 주었던 마르셀 프루스트(Marcel Proust)의 신비주의적이고 실존주의적인 소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A La Recherche du Temps Perdu)』였다.

오펜하이머는 어쩌면 자신이 가지고 있던 죄의식에 가득 찬 어두운 생각들이 활자로 표현되어 있는 것을 보며 자신의 심리적 부담을 덜었을지도 모른다. 그는 자신이 혼자가 아니라는 것을, 그런 생각이 인간 조건의 일부라는 것을 알고서는 위안을 받았을 것이다. 그는 이제 더 이상 스스로를 혐오할 필요가 없었다. 그는 사랑할 수 있었다. 그리고 지식인이었던 오펜하이머는 정신과 의사의 도움 없이 독서를 통해서 우울증이라는 블랙홀에서 빠져나올 수 있었다는 것에 대해서도 자기 위안을 받을 수 있었을 것이다.

오펜하이머가 디랙에게 몇 권의 책을 선물로 주겠다고 했을 때, 디랙은 예의바르게 제의를 거절하며 “책을 읽는 것은 생각하는 데에 방해가 된다.”라고 말했다.

보어는 훤칠한 키에 강건한 신체, 따뜻하고 부드러운 영혼에, 약간은 심술궂은 유머 감각을 가지고 있었다. 모든 사람이 그를 좋아했다. 그는 항상 속삭임에 가까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아인슈타인은 1920년 봄에 보어에게 보낸 편지에서 “당신처럼 단지 주변에 있는 것만으로 이토록 즐거움을 주는 사람을 만나기란 쉬운 일이 아닙니다.”라고 썼다. 아인슈타인은 “자신의 의견에 확고한 믿음을 가진 사람처럼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항상 진실을 모색하는 중인 것처럼 말하는” 보어의 태도에 매료되었다. 오펜하이머는 나중에 보어를 “나의 신”이라고 말하게 되었다.

“내가 가장 사랑하는 두 가지는 물리학과 뉴멕시코야. 두 가지를 한꺼번에 즐길 수 없다는 것이 안타까울 따름이야.”

노벨상을 타기 위해서는 인생의 다른 많은 것들과 마찬가지로 능력뿐만 아니라 헌신성이나 전략도 있어야 하고, 타이밍도 맞아야 하며, 무엇보다도 운이 따라야 하는 것이다. 오펜하이머는 자신의 관심을 끄는 최첨단 물리학 연구를 할 헌신성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그는 확실히 능력도 갖추었다. 하지만 그는 올바른 전략을 구사하지 못했을 뿐더러, 타이밍도 맞지 않았다. 마지막으로, 노벨상은 대개 무언가 구체적인 성과를 낸 과학자들에게 수여되는 상이다. 반면 오펜하이머의 천재성은 물리학계 전반의 성과들을 통합할 수 있는 능력에 있었다.

“나는 좀 별난 데가 있어요. 그저 열심히 걷다 보니까 어느새 집에 와 있었고, 잠자리에 들었습니다. 대단히 죄송합니다.” 이 이야기를 들은 경찰 출입 기자가 다음 날 《샌프란시스코 크로니클(San Francisco Chronicle)》 1면에 ‘건망증 교수가 여자 친구를 차에 두고 집에 가 버리다.’라는 제목의 짧은 기사를 보도했다. 이것이 오펜하이머에 대한 첫 언론 보도였다.

그는 엄격한 자기 통제가 “다른 어떤 이유보다도 영혼에 좋기 때문에 받아들여야 한다.”라고 주장했다. “나는 엄격한 자기 통제를 통해 우리가 마음의 평온과 육신으로부터의 자유에 다다를 수 있다고 믿는다……. 나는 자기 통제를 통해 우리가 점점 더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행복을 지키는 데 필수적인 그 무언가를 보존할 수 있는 방법을 배울 수 있다고 믿는다.” 그리고 엄격한 자기 통제를 통해서만이 “개인적 욕망이라는 왜곡 없이 세상을 볼 수 있게 될 것이며, 그렇게 함으로써 속세의 궁핍과 공포를 보다 쉽게 받아들일 수 있게 될 것이다.”

에티컬 컬처 스쿨에서 애들러는 “남에게 적용하는 높은 기준과 목표를 항상 스스로에게도 적용할 것”을 강조했다. 하지만 오펜하이머가 30대에 진입하면서, 그는 이와 같은 혹독한 자기 통제를 점점 불편해했다.

그는 강의하는 데 1주일에 5시간만 들이면 되었기 때문에 나머지 시간을 이용해 “물리학 연구와 다른 관심사들”에 몰두할 수 있었다. 그의 이론 작업은 착착 진행 중이었다.

진은 제라드 맨리 홉킨스(Gerard Manley Hopkins, 1844~1889년)의 어둡고 침울한 산문을 좋아했다. 또 그녀는 존 돈(John Donne)의 시들을 사랑했다. 나중에 오펜하이머가 원자 폭탄의 처녀 시험장에 붙인 ‘트리니티(Trinity)’라는 이름도 돈의 소네트 중 “나의 가슴을 쳐라, 세 사람의 신이여……(Batter my heart, three-person’d God……).”라는 구절에서 영감을 받은 것이었다.

몇몇 사람들은 오펜하이머의 정치관이 그의 개인사에 의해 결정되었다고 느꼈다. 진의 친구이자 공산당원인 이디스는 “우리는 그가 자신이 타고난 재능에 대해, 그가 물려받은 재산에 대해, 선택받은 사람이라는 것에 대해 죄책감을 가지고 있음을 알고 있었다.”라고 논평했다.

프랭크는 형의 조언을 무시한 채 재키와 결혼했다. 오펜하이머는 “그것은 그가 나에 대한 의존으로부터 벗어나겠다는 선언이었다.”라고 썼다. 오펜하이머는 재키에 대해 “내 동생이 결혼한 웨이트리스”라고 부르며 그녀를 비하했다.

그가 오펜하이머에게 소식을 전했을 때 그의 대답은 “그건 불가능해.”였다. 오펜하이머는 칠판으로 가서 핵분열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수학적으로 증명해 보였다. 누군가 실수를 저지른 것이 분명했다.

학생이 논문을 쓰다가 막혀서 마무리를 짓지 못하고 있으면, 오펜하이머는 그냥 자신이 직접 해 버리는 일이 종종 있었다.

오펜하이머의 수업에는 기말 시험이 없는 대신 과제가 무척 많았다. 대학원생이었던 에드 걸조이는 그가 수업 시간에 “엄청난 속도로” 일방적인 강의를 했다고 회고했다. 학생들은 질문이 있으면 언제든 오펜하이머의 말을 끊을 수 있었다. 걸조이는 “그는 보통 참을성 있게 대답하는 편이었지만, 명백히 멍청한 질문에는 꽤 신랄한 반응을 보이기도 했습니다.”라고 말했다.

베테는 “우리는 항상 새로운 기법을 생각해 내고, 계산을 해 봐서, 그 계산 결과에 따라 그때까지 생각했던 대부분의 기법들을 폐기하는 일을 반복했습니다. 나는 그제야 우리 그룹의 명실상부한 지도자였던 오펜하이머의 엄청난 지적 능력을 직접 목격할 수 있었습니다……. 잊지 못할 지적 경험이었습니다.”라고 회고했다

오펜하이머는 로스앨러모스에 도착하기 전까지는 자신이 맡은 책임을 인식하지 못하는 듯 보였지만, 곧 빠르게 변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보여 주었다. 윌슨은 불과 몇 달 사이에 그가 카리스마 넘치고 효율적인 행정가로 변신하는 것을 보며 놀랐다. 한때 괴짜 이론 물리학자이자 장발의 좌파 지식인이었던 오펜하이머는 이제 대단히 효율적으로 일을 처리할 수 있는 일류 지도자로 거듭나기 시작했다.

더들리 소령은 그들이 적당한 부지를 찾고 있을 때, 오펜하이머가 여섯 명의 과학자와 어느 정도의 엔지니어와 기술자들만 있으면 임무를 완수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고 주장한다. 이것은 아마도 과장이겠지만, 오펜하이머가 처음에 이 과업의 규모를 과소평가했다는 것은 확실하다. 처음에는 건설 비용으로 30만 달러의 예산이 책정되었다. 하지만 그로부터 1년 안에 750만 달러를 쓰게 되었다.

버클리에서 오펜하이머는 오전 11시 이전에 수업을 잡지 않았었는데, 이는 밤 늦게까지 사람들과 어울리기 위해서였다.

오펜하이머와 그로브스는 처음부터 모든 사람들의 급여를 각자 이전 직장에서 받던 것과 동일하게 책정하는 데에 동의했다. 이것은 사기업에서 근무하던 비교적 젊은 사람이 나이 많은 정교수보다 많은 급여를 받게 된다는 문제가 있었다. 오펜하이머는 이런 불평등을 감안해서 월세는 급여에 비례해서 책정하도록 정했다. 젊은 물리학자 해럴드 애그뉴(Harold Agnew)가 어째서 배관공이 대학 졸업자보다 거의 세 배에 달하는 봉급을 받느냐고 묻자, 오펜하이머는 배관공들은 전쟁 준비에서 연구소의 중요성에 대해 전혀 모르지만 과학자들은 알고 있지 않느냐고 대답했다. 다시 말해 과학자들은 적어도 돈 때문에 일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오펜하이머 자신도 6개월 동안이나 급여를 받지 못했다.

오펜하이머는 “항상 미합중국에 충성하겠다.”는 비밀 서약서에 서명하라는 요구를 받았다. 오펜하이머는 서약서에 서명했지만, 그 문구를 지우고 그 자리에 “나는 과학자로서 내 명예를 걸겠다.”라고 썼다. “충성” 맹세는 개인적으로 불쾌했을지 모르지만, 오펜하이머는 과학자로서 그의 신용을 서약했던 것이다

진의 자살은 오펜하이머에게 깊은 상실감을 남겼다. 그는 이 젊은 여성에게 많은 것을 걸었었다. 그는 그녀와 결혼하고 싶어 했고, 키티와 결혼한 뒤에는 필요할 때마다 곁에 있었던 충실한 친구로, 그리고 가끔씩은 연인으로 남았다. 그는 그녀가 우울증에서 벗어나도록 하기 위해 몇 시간이고 산책을 하며 대화를 나누기도 했다. 이제 그녀는 세상을 떠났다. 그는 실패했던 것이다.

오펜하이머는 거의 아프지 않았지만, 하루에 담배 4~5갑을 피우는 것이 원인이 되어 심한 기침에 시달렸다. 그의 비서 중 한 명은 “내 생각에 그는 줄담배를 피는 중간에만 파이프를 집어 들었던 것 같아요.”라고 말했다. 그는 경련을 하는 것처럼 억제할 수 없는 기침을 오랫동안 하고는 했는데, 기침을 하는 와중에도 말을 계속하느라 얼굴이 보랏빛으로 변할 때도 있었다.

보어가 오펜하이머에게 가장 먼저 물은 것은 “그것이 정말 충분히 큰가?”였다. 다시 말해서 이 신무기가 미래에는 사람들이 전쟁을 생각할 수 없게 만들 정도의 힘을 가지고 있는가라는 의미였다.

보어는 미국에 머문 몇 주 동안 오펜하이머가 원자 폭탄이 전쟁이 끝난 후에 어떤 결과를 낳을지 깊이 생각하게 만들었다. 보어는 나중에 “그것이 내가 미국에 간 이유입니다.”라고 말했다. “원자 폭탄을 만드는 데에는 내 도움이 필요하지 않았습니다.”

홀은 ‘자생적’ 스파이로서 안성맞춤이었다. 그는 러시아 인들이 원자 폭탄 프로젝트에 대해 알고 싶어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고 있을 뿐만 아니라, 소련으로부터 아무것도 원하지도 기대하지도 않았다. 그의 유일한 목적은 핵전쟁으로부터 “세계를 구하는 것”이었는데, 전쟁이 끝난 후 미국이 핵을 독점하게 된다면 이를 실현할 수 없다고 믿었던 것이다.

이제 이 장치가 독일인에게 사용되지 않을 것이라는 것이 명확해지자, 그와 다른 참석자들은 의구심을 가졌지만 명쾌한 해답은 없었다. 윌슨은 “나는 우리가 나치스와 싸우고 있다고 생각했지, 특별히 일본인들을 생각해 보지 않았습니다.” 누구도 일본인들 역시 폭탄 프로그램을 진행하고 있었다는 것을 모르고 있었다.

오펜하이머가 일어서서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하기 시작하자 모두 조용히 그의 말을 들었다. 윌슨은 오펜하이머가 토론을 “주도”했다고 회고했다. 그의 핵심 주장은 근본적으로 닐스 보어의 “열림(openness)”이라는 비전과 상통하는 것이었다. 그는 세상이 이 근원적으로 새로운 무기에 대해 모른 채 이 전쟁이 끝나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다. 최악의 경우는 장치가 군사 기밀로 남아 있는 것이었다. 그렇게 된다면 다음 전쟁은 거의 확실히 핵전쟁이 될 것이었다. 그는 그들이 이 장치가 시험 단계까지 나아가야 할 것이라고 설명했다.

오펜하이머는 로스앨러모스의 무시무시한 비밀을 세계가 알지 않고서는 전쟁을 끝낼 수 없다는 주장을 전개함으로써 설득에 성공했다. 이것은 모두에게 중요한 순간이었다. 보어의 논리는 오펜하이머의 동료 과학자들에게 특히 설득력이 있었다. 하지만 그들 앞에 서 있는 카리스마 넘치는 사람 역시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

1945년 4월 30일 히틀러가 자살했고, 그로부터 8일 후 독일은 항복했다. 세그레가 그 소식을 들었을 때, 그의 첫마디는 “우리가 너무 늦었군.”이었다

...오펜하이머는 코넌트의 이른바 “군사” 목표물, 즉 “많은 노동자가 일하고 있고, 노동자 거주 지역으로 둘러싸인 중요한 군수 공장”에 관한 계획에 대해 대안을 제시하기는커녕 비판조차 하지 않았다. 그는 정보를 공개해야 한다는 보어의 생각을 주장했지만, 결과적으로 아무것도 얻지 못하고 모든 것을 양보했던 것이다. 미국은 소련에게 맨해튼 프로젝트에 대해 적절한 사전 통지를 주지 않을 계획이었고, 일본 역시 아무 경고 없이 원자 폭탄을 맞게 될 예정이었다.

트루먼은 스탈린에게서 소련이 8월 15일 일본에 선전포고를 할 것이라는 약속을 받아 둔 터였다. 트루먼은 “그는(스탈린은) 8월 15일에 일본과의 전쟁을 시작할 것이다.”라고 일기에 썼다. “그렇게 되면 일본은 끝장일 것.”

오펜하이머는 시험 부지를 “트리니티(Trinity)”라고 이름 붙였으나, 나중에 왜 그 이름을 골랐는지 기억하지 못했다. 그는 막연하게 “나의 심장을 쳐라, 삼위일체의 신이여.”라고 시작하는 존 돈의 시를 떠올렸던 것을 기억했다. 하지만 이는 그가 다시 한번 바가바드기타로부터 영감을 얻었음을 보여 준다. 힌두교 교리의 삼위(트리니티)는 창조자 브라마(Brahma), 보존자 비슈누(Vishnu), 그리고 파괴자 시바(Shiva)였던 것이다.

그로브스는 완벽성보다는 속도를 강조했다. 모리슨은 “폭탄을 완성하는 기술 작업을 하던 우리에게는 8월 10일 부근이 위험, 자금, 그리고 제대로 된 디자인을 희생하더라도 꼭 맞추어야 할 최종 기일”이라는 지시를 받았다(스탈린은 8월 15일까지는 태평양 전쟁에 참전할 예정이었다.).

1965년 NBC 다큐멘터리에서 그는 “우리는 이 세상이 예전 같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몇몇은 웃었고, 몇몇은 울었습니다. 대부분은 말을 잇지 못했습니다. 나는 힌두교 경전인 바가바드기타의 한 구절을 기억했습니다. 비슈누 왕자에게 그의 임무를 완수해야 한다고 설득하고 있습니다. 그에게 감명을 주기 위해 비슈누는 팔이 여러 개 달린 형태를 취하고서는 ‘이제 나는 죽음이, 세계의 파괴자가 된다(Now I am become death, the destroyer of worlds).’고 말합니다. 우리 모두가 근본적으로는 이와 같이 생각했을 것입니다.”라고 기억했다. 오펜하이머의 친구인 에이브러햄 페이스는 이 인용문이 오피의 “승려 같은 과장”처럼 들린다고 말하기도 했다.

통제 센터를 떠나면서 오펜하이머는 베인브리지와 악수를 나눴다. 베인브리지는 그의 눈을 쳐다보면서 “이제 우리는 모두 개새끼들이다(Now we’re all sons-of-bitches).”라고 중얼거렸다

“그는 아주 우울해졌습니다.”라고 윌슨은 말했다. “그만큼 우울해 한 사람도 없었습니다. 그가 집에서 기술 구역으로 걸어오고, 내가 간호사 숙소에서 출발하면 중간 어디선가 만나고는 했지요. 그날 아침, 그는 파이프 담배를 피우면서 ‘저 불쌍한 사람들, 저 불쌍한 사람들’이라며 일본인들을 걱정했습니다.”라고 말했다.

바이스코프가 나중에 썼듯이 “전쟁은 과학이 모두에게 가장 직접적인 중요성을 가진다는 것을 가장 잔인한 방식으로 명확하게 보여 주었습니다. 이것이 물리학의 성격을 바꾸어 놓았습니다.”

체르니스는 자신의 친구가 어쩌면 말을 너무 잘해서 다치게 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대중 연설을 할 수 있는 능력은 독과 같습니다. 그 능력을 가진 사람에게는 매우 위험하지요.” 그와 같은 재주를 가진 사람은 자신의 매끄러운 화술이 효과적인 정치적 보호막을 제공한다고 생각하게 마련이다.

전직 부통령과 워싱턴 시내를 가로질러 상무부 건물 쪽으로 걸으면서 오피는 폭탄에 대한 자신의 깊은 걱정을 드러냈다. 그는 재빨리 현 정부의 정책에 내재된 위험을 간략하게 설명했다. 나중에 월리스는 자신의 일기에 “나는 오펜하이머처럼 불안한 정신 상태를 가진 사람을 본 적이 없다. 그는 전 인류의 파멸이 코앞에 다가왔다고 느끼는 듯했다.”라고 썼다.

대화 중에 트루먼은 갑자기 그에게 러시아 인들이 언제쯤 그들의 원자 폭탄을 만들 수 있겠냐고 물었다. 오펜하이머가 모른다고 대답하자, 트루먼은 확신에 찬 목소리로 자신은 대답을 안다고 말했다. “영원히 만들지 못할 것입니다.” 오펜하이머는 그와 같은 어리석음은 트루먼의 한계를 보여 주는 증거라고 생각했다. 히긴보텀은 “대통령이 전혀 상황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을 보자 그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습니다.”라고 회고했다.

나중에 누군가 대통령이 “손에 피라니, 제길. 그는 내 손에 묻은 피의 절반도 묻히지 않았어. 그걸 아프다고 떠들고 다니다니.”라고 중얼대는 것을 들었다. 그는 나중에 애치슨에게 “나는 두 번 다시 저 개자식을 만나고 싶지 않아.”라고 말했다. 1946년 1월까지도 이 일은 그의 마음에 각인되어 있었고, 그는 애치슨에게 오펜하이머를 “5~6개월 전에 내 사무실로 찾아와 손을 비비면서 원자력 에너지를 발견하여 자신들의 손에 피를 묻혔다고 말한 울보 과학자”라고 표현했다.

이 중요한 만남에서, 평소에는 매력 있고 냉정한 오펜하이머는 평정과 설득력을 잃어버리고 말았다. 그는 평상시에는 자연스럽게 행동할 수 있었으나, 긴장만 하면 깊이 후회할 만한 말을 했고, 이는 그를 심각한 곤경에 빠뜨렸다. 이 경우에 그는 핵 지니를 호리병 속으로 다시 집어넣을 수 있는 권력을 가진 유일한 사람에게 좋은 인상을 남길 수 있는 기회를 잡았지만, 안타깝게도 그 기회를 놓치고 말았다. 체르니스가 궤뚫어보았듯이, 그의 유창한 화술은 양날의 칼이었다. 그것은 설득의 도구이기도 했지만, 오랫동안 연구하고 준비했던 것을 깎아내리는 결과를 가져오기도 했다. 이처럼 그의 지적 자만심은 가끔씩 그가 바보 같은 행동을 하게 해 엄청난 결과를 초래하고는 했다. 그것은 오펜하이머에게 일종의 아킬레스 건 같은 것이었다. 그것은 결국 그의 정적들에게 그를 파괴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게 될 것이었다.

그는 자신의 학생들이 바보 같은 질문을 하지 않는 이상 참을성 있고, 친절하며, 부드러운 선생님이었다. 하지만 권력자들에게 그는 참을성 없고, 무례할 정도로 솔직했다.

오펜하이머는 장기적으로 보았을 때 “세계 정부 없이는 영구적 평화를 얻을 수 없고, 평화가 없다면 세계는 필연적으로 핵전쟁으로 귀결될 수밖에 없다.”라고 믿었다.

릴리엔털은 자신의 일기에 “그는 대단한 매력과 탁월한 지적 능력을 갖춘 비극적 인물이다. 나는 떠나면서 그가 슬퍼하고 있음을 보았다. ‘(오피는) 나는 어디든 가서 어떤 일이든 할 준비가 되어 있지만, 더 이상 새로운 아이디어를 낼 수는 없을 것 같아. 그리고 나는 그동안 내 인생이나 다름없었던 물리학과 물리학을 가르치는 것이 이제 아무런 의미가 없다고 느낀다.’ 특히 마지막 문장에서 나는 매우 가슴이 아팠다.”라고 썼다.

그는 먼 미래에 국제 통제가 이루어질 수 있으리라는 희망까지 포기하지는 않았지만, 지금으로서는 미국이 무장할 수밖에 없다고 결정했던 것이다. 결국 그는 상당히 우울해하긴 했지만, 원자력 에너지 위원회의 주된 임무가 “핵무기, 좋은 핵무기, 그리고 많은 핵무기를 제공하는 것”이어야 할 것이라는 결론에 도달하게 되었다. 오펜하이머는 1946년에는 국제 통제의 필요성과 투명성을 설파했지만, 1947년이 되자 다수의 핵무기에 의한 국방 계획을 받아들이기 시작했던 것이다.

43세의 그는 섬세하고 연약해 보이기까지 했다. 하지만 그는 사실 꽤 강하고 활기에 넘쳐 있었다. 다이슨은 “그는 매우 마르고, 신경질적이고, 안절부절했습니다.”라고 회고했다. “그는 항상 왔다 갔다 했습니다. 5초도 가만히 있지를 못했지요. 그는 엄청난 불안에 시달리는 사람 같았습니다. 그는 항상 담배를 피워 댔습니다.”

페이스는 1948년 2월 자신의 일기에 “이곳은 비현실적인 곳이다. 보어가 내 사무실에 들어와 이야기한다. 창밖을 내다보면 아인슈타인이 그의 조수와 함께 집으로 걸어가고 있다. 옆 사무실에는 디랙이 앉아 있다. 아래층에는 오펜하이머가 있다.”라고 썼다. 이곳은 세계 어디에서도 찾아 볼 수 없는 과학적 재능의 총집합소였다. 물론 로스앨러모스를 제외하고.

오펜하이머는 연구소가 과학뿐만 아니라 인문학까지 아우르는 것이 중요하다고 굳게 믿었다. 연구소에 대한 그의 강연에서 오펜하이머는 과학자들이 과학 자체의 특성과 결과를 보다 잘 이해하기 위해서는 인문학이 필수적이라고 강조했다.

오펜하이머는 “기하학과 중력을 통합한” 일반 상대성 이론을 창안한 사람의 “남다른 독창성”에 깊은 존경심을 갖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아인슈타인이 “창의적인 작업에 오래된 전통 요소들을 적용했다.”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오펜하이머는 아인슈타인이 말년에 이 “전통”에 발목을 잡혔다고 강하게 믿었다.

오펜하이머가 상원 빌딩의 회의실에 들어섰을 때 그는 스트라우스의 입장에 대해 알고 있었다. 그는 물론 이에 동의하지 않았고, 그런 우려는 전혀 근거 없는 것임을 명확히 했다. 그는 “그 누구도 방사능 동위 원소를 원자력 에너지를 얻는 데에 절대로 사용하지 못한다고 말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원자력 에너지를 얻으려면 삽도 필요하지요. 원자력 에너지를 얻으려면 맥주도 필요할 것입니다.”라고 증언했다. 그러자 청중석에서 가벼운 웃음이 터져 나왔다. 그날 필립 스턴(Philip Stern)이라는 젊은 기자가 청문회 방청석에 앉아 있었다. 스턴은 이런 야유가 누구를 향한 것인지 몰랐지만, “오펜하이머가 누군가를 바보로 만들고 있다는 것은 명확했다.”라고 썼다.

오펜하이머가 사소한 의견 차이 때문에 스트라우스에게 망신을 주려고 의도한 것은 아니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오펜하이머는 쉽게 오만함을 보였다. 이와 같은 태도는 그가 교실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면서 얻은 것이었다. 한 친구는 “로버트는 다 자란 어른들도 어린아이처럼 느끼게 할 수 있었지요.”라고 말했다. “그는 거인도 바퀴벌레처럼 느끼게 했어요.” 하지만 스트라우스는 어린 학생이 아니었다. 그는 예민하고, 복수심에 불타는 데다, 쉽게 수치심을 느끼는 성격을 가졌고 권력까지 쥐고 있었다. 그는 그날 매우 화가 나서 청문회장을 떠났다. 또 다른 원자력 에너지 위원회 위원인 고든 딘은 “나는 루이스의 무서운 표정을 아직도 기억한다.”라고 말했다. 몇 년 후 릴리엔털은 “그는 사람 얼굴에서 흔히 보기 어려운 증오의 표정을 짓고 있었다.”라고 생생하게 기억했다.

자유로운 정신을 가진 변덕스러운 여인이었던 키티가 프린스턴의 꽉 막힌 상류 사회에 어울리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었다. 페이스의 한 동료는 프린스턴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당신이 싱글이라면 아마 미쳐 버릴 것입니다. 결혼했다면 당신의 아내가 미쳐 버릴 것입니다.” 프린스턴은 키티를 미치게 했다.

키티와 피터는 유대감을 갖지 못했고 모자 관계는 자주 티격태격했다. 오펜하이머는 키티가 문제라고 느꼈다. 홉슨은 “오펜하이머는 그들이 열정적으로 사랑에 빠지는 바람에 피터가 너무 빨리 생겼고, 키티는 그 때문에 자신을 원망했다고 생각했다.”라고 말했다.

키티가 가정생활을 비참하게 만들었다면, 오펜하이머의 무관심과 냉정함은 그것을 견딜 수 있게 해 주었다. 그는 결혼 생활을 유지하기로 의식적으로 마음먹은 터였다.

바이스코프는 열핵 무기로 전쟁을 하는 것은 자살 행위라고 주장했다. 베테는 “그런 전쟁이 벌어진다면, 우리가 승리하더라도 세계는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파괴될 것이라는 데 동의할 수밖에 없었다. 우리는 전쟁을 통해 지키려는 것들을 잃게 될 것이었다. 우리는 매우 길고 어려운 대화를 나눴다.”라고 말했다.

그는 가까운 미래에 “우리는 두 강대국들이 상대방은 물론이고 인류 문명 전체를 끝장낼 수 있는 위치에 도달하는 것을 보게 될 것입니다. 다만 자국의 파멸까지도 각오해야 할 것입니다.”라고 말했다. 그러고 나서 오펜하이머는 “우리는 유리병 속에 든 두 마리의 전갈과 같습니다. 서로 상대방을 죽일 수 있는 능력을 가졌지만, 그러려면 자신의 목숨을 걸어야 하는 것이지요.”라고 덧붙여 청중의 간담을 서늘하게 했다.

그는 아인슈타인을 설득해 오펜하이머를 지지하는 간단한 성명서를 작성하도록 했다. “나는 그를 과학자로서뿐만 아니라 한 사람의 위대한 인간으로 존경한다.” 그는 이것을 전화로 《유나이티드 프레스》 기자에게 읽어 주었다.

“오펜하이머의 명석한 두뇌와 미숙한 성격은 묘한 모순을 이루었습니다…… 그는 사람들, 특히 자신의 자녀들을 어떻게 다뤄야할지 몰랐습니다.” 릴리엔털은 나중에 오펜하이머가 자녀들의 인생을 “망쳐 버렸다.”는 가혹한 결론을 내릴 수밖에 없었다.

키티는 잠시 동안 낸시를 쳐다보다가 들고 있던 손전등으로 있는 힘껏 그녀를 내리쳤다. 다행히 키티의 타격은 낸시의 뺨을 스쳤을 뿐이었다. 기브니는 나중에 “나는 그녀의 어깨를 잡고 ‘그들의 방’에 넣은 후 문에 빗장을 걸었다.”라고 썼다. 다음 날 아침 낸시는 어머니를 방문하러 보스턴으로 떠나면서 자녀들에게는 “그 미친 사람들이 떠난 후”에 돌아오겠다고 말했다. 오펜하이머 가족은 8월 중순이 되어서야 떠났다.

낸시가 직접 싸운 것은 키티였지만 진짜 혐오했던 것은 오펜하이머였다. “나는 비록 겉으로 내비치지는 않았지만 키티를 남몰래 존중하고 좋아하게 되었다. 그녀는 적어도 악의는 없었고, 작은 사자처럼 용감했으며, 자기편에 대한 맹렬한 충성심으로 가득 차 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오펜하이머를(처음에는 그에 대한 호의적인 인상을 가졌지만) 교활하다고 생각했다. 오펜하이머에 대한 낸시의 인식은 독특하게도 적대적이었다. 그해 여름의 일을 적은 에세이에서 그녀는 히로시마에 원자 폭탄을 투하한 지 14주년이 되던 날이었던 8월 6일에 대해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그날 우리집에 머문 손님들은 과거에의 향수를 느끼며 그 시절을 회고했다. 그날 로버트 오펜하이머를 본 사람이라면 누구도 그의 전성기에 대해 왈가왈부할 수 없었다……. 그는 의심할 바 없이 폭탄과 그것을 만드는 데에 자신이 지도적인 역할을 했다는 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했다.”